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 사건 (문단 편집) == 전개 == * 새벽 1시 30분 1996년 2월 25일 새벽 1시 30분, 최고참인 [[이순철]]의 방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순철은 늦은 밤에 걸려온 전화에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코치진 중의 막내이자 이순철에게는 고교 후배가 되는 [[장채근]] 배터리코치였다. 당시 장채근 코치는 1995 시즌을 끝으로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해태 코치로 합류한 상태였는데 [[김응용]] 감독이 '''"선수들 밖에 못 나가게 잘 감시해라"'''라는 명령을 코치진들에게 내렸고 코치 중 막내인 장채근이 선수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부재를 확인했던 것이다. 이순철은 가뜩이나 밤 늦은 시간에 전화가 걸려온 것도 짜증이 나는데 하필 전화를 건 사람은 본인의 후배인 장채근이었다는 점에서 기분이 상했다. 그러자 '''"이봐. 장 코치. 아니 지금이 몇 시인데 굳이 전화까지 해서 감시를 하냐"''' 라면서 짜증스러운 말을 남기고 끊었다. * 아침 6시 짜증내면서 아침 산책을 나가려는 이순철은 감독과 코치진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결국 화를 참으며 아침 산책[* 김응용 감독은 아침 일찍 선수들을 불러내서 강제로 산책을 시켰다. 표면적인 이유는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 정신도 차리고 밥맛도 돌게 할 겸 몸을 풀자는 것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전날 밤에 음주 유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난데없이 음주 유무를 확인한 이유는 당시 해태 선수들 중에 유난히 술을 좋아했던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필 불시 산책에 결석해서 자주 걸리던 사람이 [[이병훈(야구)|이병훈]]... 결국 이 일로 인해 이병훈은 김응용 감독과의 관계가 나빠져서 1996년 시즌 중 [[동봉철]]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었다.]을 나가려는데 옆에 있던 [[유남호]] 수석코치가 이순철에게 '''"이 자식... 뭘 그런 걸 갖고 성질내냐"''' 라고 하면서 계속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다 짜증이 폭발한 이순철이 엉겁결에 주먹질을 했는데 이순철의 주먹이 유 코치의 뺨을 정통으로 때렸다. 그러자 유남호 코치도 이순철의 뺨을 때렸고 이 과정에서 선수들과 코치진들이 뜯어 말리는 일이 벌어졌다. 격분한 이순철은 산책길의 정반대 방향으로 씩씩거리면서 나갔고 선수들도 당시 주장이었던 [[김정수(1962)|김정수]]를 필두로 이순철을 뒤따랐다. 해태 선수들이 이순철을 뒤따라 나선 것은 코치의 지시보다 선수단 내 위계질서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 아침 8시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간 선수들은 잔뜩 열 받은 상황이었다. 아예 '''"코치진의 버릇을 고치겠다"'''라는 생각으로 '''"훈련 거부하고 귀국하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윤기두[* 현재 KIA 타이거즈로 바뀐 뒤에 운영실장을 맡았으며, 전 외야수 [[윤민섭(야구)|윤민섭]]의 아버지이다.] 매니저에게 "'''코치들이랑 같이 못 있겠으니 여권을 내놓으십시오'''"라고 따진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응용 감독은 직접 식당에 나와서 "'''이렇게 썩어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은 나가고 싶어도 비행기 표가 없으니 참아달라. 나 1년 만 더 하자.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라면서 선수들에게 '''눈물로 읍소한다.''' 감독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선수들도 조금은 마음이 약해졌고 당시 최윤범 운영팀장과 윤기두 매니저까지 나서서 설득하자 선수들은 "'''그래도 훈련은 하자.'''" 라며 온건하게 대응한다. * 오후 1시 선수단의 분위기는 개판이었지만 당시 하와이 훈련장에 출장 취재를 온 해태 출입기자들의 눈치도 보여서 억지로 훈련을 했다. 그러자 코치들이 '''"이 따위 놈들과는 훈련 할 생각 없다."'''라는 말을 하면서 훈련을 거부했고 결국 김응용 감독이 직접 [[펑고]]를 쳐주었다고 한다. 청백전의 선발은 [[강태원(야구선수)|강태원]]으로 정해졌으나, 강태원은 팔꿈치가 아프다고 하여 청백전은 이뤄지지 않았고 선수들은 식사를 위해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이 때부터 기자들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챘으나 당시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는데, 당시 기사 송고 시스템은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통해 전송되지 않던 시절인데다 당시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인지한 해태 구단 홍보팀은 하와이 출장을 온 기자들을 한데 모아서 하루종일 하와이 관광을 시켰다고 한다. 거기에 선동열이 2월 24일 모친상을 당했고 광주에서 장례를 치르고 있던 터라 이쪽으로 취재진의 관심이 쏠린 것도 이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지 않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 오후 3시 고참들은 비교적 매를 덜 맞았지만 후배들은 많이 맞았다. 이렇다 보니 젊은 선수들은 호텔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순철은 자신의 저지른 사태가 확대되는 일이 생기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는 이 사태를 대충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경파인 김정수, 이건열, 조계현, 송유석, 이강철, 홍현우는 귀국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윤기두 과장이 나서 '''"팀이 이 사태로 분열되면 너희만 피해를 보게 되고 이 사건이 퍼지면 이순철은 야구계에서 영원히 매장될지도 모른다."''' 라면서 선수단을 설득했다. 결국 이 설득이 먹혀 고참 선수들은 이를 수용하게 되었고 모두 저녁에 숙소로 돌아갔다. 상술한 사건 흐름으로만 보면 하루 만에 사건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데, 당시 코치였던 [[김종모]]가 밝힌 바에 따르면 실제로 이 사건은 일주일 넘게 갔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